“농지 늘리고, 콩·밀·보리 등 주요 곡물의 자급률 대폭 높여야”“밀·콩·보리 등 주요 곡물에 대한 국내 자급률을 끌어올려야 한다.”
농업 경제·정책 전문가들과 농민단체 관계자들은 3일 경향신문과의 대담에서 상시화하고 있는 세계 곡물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국내 자급률 향상 및 법제화’ ‘곡물수매제 도입’ ‘농지 확보’ 등을 제시했다. 최근 제기되고 있는 국제적 공조강화 움직임에 대해서는 “필요하지만 실효성 있는 공조를 이루기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농지 전용을 막아야 한다는 의견도 다수였다. “국내 축산 시스템을 소규모 지역순환체제로 전환하고, 육식 소비를 줄여나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전문가 9명과의 대담은 전화 인터뷰로 이뤄졌다.
유엔 식량농업기구 직원들이 지난 7월18일 소말리아 난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하고 있다. 유엔은 소말리아 지역 기근으로 250만명이 심각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돌로(소말리아) | AP연합뉴스
■ “공조 필요하지만 실효성 없어”지난달 30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21개국 재무장관들은 “최근 농산물 가격 급등이 위험요소로 부상하고 있다”며 “수출 금지나 수출 제한 조치를 막겠다”고 합의했다. 2008년과 2010년 두 차례 곡물파동 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 곡물 수출국들이 취한 농산물 수출 제한 조치의 재등장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지난달 23일 주요 20개국(G20) 정상들에게 국제 곡물가격 안정을 위한 공조노력을 촉구하는 협조 서한을 발송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위기 상황에서는 국제공조가 실효성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윤석원 중앙대 교수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안에서 수출국이 자국 사정에 따라 수출 금지를 했을 경우에 다른 나라들이 규제할 수 있는 어떤 조치도 없다”며 “구속력 없는 선언에 불과하며 국제정치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이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농어업부문 공동선대위원장으로 MB정권 농어업정책의 뼈대를 세운 사람이다.
윤병선 건국대 교수는 “국제공조가 힘을 받으려면 곡물 수출 주요국인 미국부터 다량의 옥수수를 바이오 연료로 전환하는 정책의 변화부터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정환 GSnJ인스티튜트 이사장은 “큰 기대를 하긴 어렵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국제공조가 잘되도록 문제제기하고 무엇보다도 WTO(세계무역기구) 안에서 논의의 장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자주율보다 자급률 향상 우선”정부는 해외 곡물기지 건설 및 조달을 통해 곡물 자주율을 현재 27%에서 2015년 55%, 2020년 65%로 높인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2009년 민간기업과 함께 동남아시아에, 지난해에는 곡물유통회사를 설립해 미국에 각각 진출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국내 자급률을 높이는 방안이 우선”이라고 입을 모았다. 송원규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연구원은 “국내에서 자급률을 높이는 방안부터 고민한 뒤 해외에서 조달하는 방법으로 가야 하는데 현 정부는 자주율이라는 개념을 도입, 곡물의 해외 조달에만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고 지적했다.
윤석원 교수도 “해외농장 및 해외곡물유통회사 설립 등은 결국 제2방안”이라며 “제1방안은 국내 생산자원 활용을 최대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또 ‘국내 기업이 해외 곡물유통시설을 확보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환 이사장은 “1인당 경지면적이 고작 396㎡(120평)인 상황에서 쌀, 채소, 과일, 사료까지 키운다”며 “국제곡물시장에서 원활한 물량 조달을 위해 곡물유통시설의 확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수매제는 WTO 규정에 위배”수매제는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직접 농산물을 사들여 비축했다가 낮은 가격으로 시장에 방출하는 제도이다. 수입농산물과의 가격 경쟁력을 갖추고 농가소득도 올릴 수 있다는 아이디어다. 쌀의 경우 2005년까지 수매제였다가 이후 정부가 시장가격으로 사서 비축하는 공공비축제로 전환했다. 전농·전여농 등 농민단체와 몇몇 전문가들은 밀·보리 등의 곡물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수매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문가 9명의 의견은 엇갈렸다. 윤병삼 충북대 교수는 “곡물을 수매해서 보관하는 데 드는 비용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양승룡 고려대 교수는 “WTO가 금지하는 보조금에 해당해 운용하기가 녹록지 않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WTO 체제 내에서 식량안보 관련 보조금을 허용하도록 합의가 돼야 한다”며 “WTO에서 적극적인 합의를 통해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국가수매제를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반면 윤병선 교수는 “생산자 단체인 농협이 수매의 주체가 된다면 WTO 규제를 벗어날 수 있다”며 수매제를 지지했다. 윤석원 교수는 “현재 우리 밀, 우리 보리 등에 대한 소비시장이 형성되지 못했다”며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수매를 해서 적절한 가격으로 제분업체 등 가공업체들에 공급하는 과정이 5~10년 동안 지속돼야 비로소 국내산 곡물에 대한 시장이 형성돼 자급률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 “농지 확보가 시급하다”전문가들은 “농지 전용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명철 농협경제연구소 축산경제연구실장은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생산기반인 농지를 최소한 어느 정도 확보해야 할지부터 목표로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 실장은 “수치 목표가 없으면 농지 전용이 무분별하게 이뤄져 자급률은 계속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농지가 부족한 상황에서 생산자원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며 “4대강 유역 등 하천 주변에도 보리 등 조사료를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재영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정책조정팀장은 “이명박 정부 이후 우량농지가 큰 폭으로 감소했다”며 “농지 목표 설정도 중요하겠지만 정부가 농업을 보호하고 식량안보를 달성하겠다는 의지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승룡 교수는 “미국은 곡물이 과잉생산돼 가격이 낮아질 경우,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농지를 빌려 농사짓는 대신 습지대로 만든다. 곡물 가격이 높아져 식량문제가 심해지면 그 농지를 다시 이용한다”며 “한국은 그러나 비농업지역으로 규제를 풀어주는 위험한 짓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윤병삼 교수는 “장기적으로 필요한 농지 규모를 법제화하는 방안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이모작 등 수확을 끝낸 논에 보리 등을 재배해서 100% 조금 넘는 현재의 경지 이용률을 높이는 쪽으로 가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 “곡물 자급률 법제화해야”곡물 자급률을 법제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성명환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곡물실장은 “현재 곡물 자급률을 설정해도 실질적인 노력은 미흡하다”며 “자급률이 법제화된다면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부가 밀 자급률을 현재 1%에서 2020년 10%로 높이겠다고 하는데 현재 농가들이 밀을 생산해도 판매가 안되고 있다”며 “정부가 자급률 목표를 세웠으면 종자 연구·개발, 밀제품 품질, 가격문제 등 단계별로 해결하려 해야지 밀 소비를 늘려달라고 국민만 바라보는 것은 안된다”고 말했다.
박재영 팀장도 “곡물 자급률 확보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실현방안이 없다”며 “밀이 쌀보다 손이 많이 들어가고 생산비도 많이 들어서 고령화된 농촌 상황에서 밀 자급률을 높이는 게 쉽지 않은데 이에 대한 정부의 전망과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곡물 소비가 많은 국내 축산 시스템을 전환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정환 이사장은 “지역에서 경종농업(벼·밀·보리 농사)과 함께 소규모로 지역순환축산이 이뤄져야 환경적으로도 건강해지고 사료 자급이 가능해지는 등 축산업 자체가 안정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윤병삼 교수도 “육류에 대한 국내 수요를 줄이는 방안도 고민해봐야 한다”며 “곡물사료를 덜 먹는 가축으로 국내 축산 시스템을 전환시킬 필요성도 있다”고 말했다.
▲ 곡물 자급률
쌀·보리쌀·콩·사료용 작물과 같은 각종 곡물의 국내 소비량 중 국내 생산량이 차지하는 비율을 말한다.
▲ 곡물 자주율
곡물의 소비량 중 생산량이 차지하는 비율이라는 점에서 자급률과 유사하다. 다만 곡물 생산량에 국내에서 생산한 곡물은 물론 한국 공·사기업 등이 해외에서 생산·유통한 곡물도 포함시켜 계산한다.
※ 설문에 참여해 주신 분들
■ 농민단체 = 박재영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정책조정팀장, 송원규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연구원
■ 학계 = 양승룡 고려대 교수, 윤병삼 충북대 교수, 윤병선 건국대 교수, 윤석원 중앙대 교수
■ 연구소 = 성명환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곡물실장, 이정환 GSnJ인스티튜트 이사장, 황명철 농협경제연구소 축산경제연구실장 (가나다 순)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